19.윤서네 교실 좌석 배치 – 102
오늘은 꽃사슴초등학교 윤서네 반에서 좌석을 다시 바꿔 앉는 날이다. 어느 학교, 어느 학년, 어느 반이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바꾸는 날은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큰 행사로 돼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는 자리 배치가 큰 관심의 대상이다. 그까짓 것 아무 데나 앉으면 어떠냐고 하겠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지 좋아하는 친구가 있고 같이 짝이 돼 앉고 싶은 친한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고학년이 되면 사춘기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이성끼리의 짝꿍이 되는 것에 퍽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인기 있는 짝이 있고 서로 멀리하게 되는 짝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 담임선생님의 슬기로운 묘안이 효과를 발휘해야하는데, 자칫 잘 못하여 부작용이 나면 며칠은 저기압으로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
드디어 윤서네 학급 자리 바꾸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모두 선생님의 지시로 이사 갈 준비로 부산하다. 윤서는 어제 밤 꿈에 돼지꿈을 꾸어 재수가 좋을 것 같아 기대하고 있다.
예전엔 돼지꿈을 꾸면 아들 낳을 태몽 꿈이라며 어른들이 좋아하는 소리를 들어서다. 아이들이야 무슨 태몽 꿈일까마는 그래도 오늘, 자리 바꾸는 날에는 윤서가 좋아하는 인숙이랑 짝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서뿐만 아니라 윤서네 반에서 남자는 물론 여자 애들까지도 인숙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인숙이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지만 그 보다도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해서 인숙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 윤서의 한 가지 고민은 인숙이까지 차지하려는 욕심은 접어두고라도 반에서 제일 싫어하는 종혜와 짝이 될까 걱정이 앞섰다. 종혜는 인숙이와는 정반대다. 공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뚱뚱한 몸매에 키도 작고 얼굴이 못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좀체 말이 없으며, 조금만 건드려도 울보가 된다는 것이다.
윤서네 담임선생님은 학년 초, 첫 시간에‘학급 경영철학’이라는 어려운 말머리를 꺼내 한바탕 훈화를 하신 적이 있다.
*철학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
*경영철학 - 기업이나 사업 및 학급을 자신의 경험을 살려 관리하고 운영 하는 일
자리 바꾸는 것만은 선생님의 철학대로 하신다고 엄명을 내려놓은 게 있어, 반 아이들은 그 ‘철학’ 앞에 꼼짝 못하고 석 달을 보냈다.
담임선생님의 확고한 철학이라는 게 뭐 별달리 묘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반보다 특이한 게 꼭 한 가지가 있다. 특이한 것이란, 아이들이 원하는 짝과는 정반대의 짝을 정해 주신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정해주신 짝이 싫다고 같이 앉지 않는 날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돌부처가 되어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세워 둔다는 점이다. 이쯤 되고 보면 항복 안 하는 아이들이 없다.
그것뿐이 아니다. 미술 재료나 학습 준비물 같은 것도 잘 챙겨 오지 않으면 수업 시작 전에 미리 자진해서 뒤에 나가 꿇어앉아 반성을 해야 한다. 이 법칙은 다 같이 서로 약속해둔 규칙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헌법으로 알고 있다.
자리 바꾸기 전날, 반 아이들은 같이 앉고 싶은 아이 이름을 써서 제출하면 다음날 선생님께서 좌석 배치 일람표라는 방을 붙이신다. 아이들은 그 방을 보고 자기 짝과 자리를 확인한 후 쉬는 시간에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아야한다. 물론 짝은 남녀 혼성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다른 선생님과 특별히 다르다면 꼭 아이들이 희망했던 계획을 거꾸로 틀어지게 배치한다는 철학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원하는 여자(여자인 경우 남자) 짝꿍과 앉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골고루 돌아가며 서로 친하게 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말씀이다. 그 대신 2주일이면 반드시 새로 자리를 바꾼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짜낸다. 자리 바꿀 때 일부러 좋아하지 않거나 싸우고 나서 미운 짝꿍의 이름을 써내도 어떻게 아셨는지 그럴 때는 원대로 앉혀, 기어코 사이 나쁜 짝꿍과 짝이 되곤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사리에 밝은 선생님 별명을 귀신같다며 ‘귀신’이라고 부르곤 했다. 아이들은 선생님 몰래 별명을 부를 땐 거꾸로 ‘신귀’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이들은 속일 수도 없고 그냥 신귀 선생님이 정해주시는 짝과 싫든 좋든 보름을 같이 지내야했다.
윤서는 매번 인숙이 이름을 써 넣었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윤서는 오늘 재수 좋게 돼지꿈까지 꾸었으니 어쩌면 한 번도 같이 앉아보지 못한 인숙이와 짝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잔뜩 기대하고 어서 방이 붙기를 고대하고 있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굵직한 싸인펜 글씨로 쓴 좌석 일람표를 붙이시고 교무실로 떠나셨다. 그 쉬는 시간에 반 아이들은 새 자리로 이사를 끝내야 한다. 아이들은 조마조마하니 가슴 조이면서 게시판 앞으로 모여들었다.
윤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숙이는 놔두고 제발 종혜하고 만 짝이 안 되었으면 돼지꿈 덕을 톡톡히 볼 것이라고 생각하며 게시판 앞으로 다가갔다. 그 때 앞서간 영길이가 우와! 하고 소리 지르며 윤서의 어깨를 툭 치며 “시나브로: 분발!” 하는 게 아닌가!
옳지! 윤서는 정신이 번쩍 나 과연 어젯밤 꿈 덕을 톡톡히 보나보다 하고 그도 손을 들어 '분발!' 하며 얼른 인숙이를 돌아보았다. 그 때 마침 인숙이와 눈이 마주치자 인숙이도 윙크를 보내왔다. 보나마나 인숙이도 저와 짝이 되어 나에게 기쁜 신호를 보낸 것으로 알고 ‘틀림없겠지.’ 하며 게시판을 쳐다보았더니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윤서는 눈을 닦고 다시 쳐다보아도 거기엔 장인숙이의 이름은 없고 강종혜라는 이름이 분명히 씌어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닦고 손가락까지 그의 이름자 옆에 짚고 살펴봐도 옆 짝은 강종혜가 틀림없었다. 이럴 수가!
돼지꿈이 이렇게 빗나갈 수가 있나?
뾰로통한 모습으로 영길이를 째려보며 자리에 앉은 윤서는 공부가 시작되고서도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윤서는 영길이 한 테 놀림당한 분을 사기지 못해 다시 영길이 쪽을 째려보니 그는 윤서의 기분은 아랑곳도 않고 인숙이랑 짝이 되어 둘이 좋아라고 웃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더욱 배알이 꼬여 이를 악물고 수업이 끝나면 ‘어디. 두고 보자!’며 이를 앙다물었다.
종혜는 부아가 난 윤서를 한 번 흘금 쳐다보더니 엷은 미소를 흘렸다.
윤서는 그 꼴이 더 더욱 얄미워 의자를 소리 나게 바같 쪽으로 끌어내 종혜와의 사이를 더 띄워 놓았다. 종혜는 윤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 않고 이번 시간 공부할 수학 책과 준비물을 꺼내느라 달그락거렸다.
이크! 윤서는 그제야 종혜의 학습 준비물을 보곤 퍼뜩 정신이 났다. 학습 자료로 방안지(모눈종이)를 잊고 온 게 생각이 났다. 선생님은 이미 책상 사이로 다니시며 아이들 준비물을 확인하는 중이고, 뒤에는 준비물을 잊고 온 한 녀석이 벌써 나가 꿇어앉은 게 보였다.
오늘, 윤서는 처음으로 준비물을 챙겨 오지 않은 벌을 단단히 받게 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 너무 부끄러워 벌써부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화끈거렸다. 어느 새 콧잔등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자진해 받는 규칙도 반 아이들과 신귀 선생님과의 약속된 선생님의 철학이다.
벌써 선생님은 윤서 쪽 책상 사이 골목에 들어오고 있다. 왠지 손에 땀이 나고 얼굴이 더욱 화끈거렸다. 여태 이런 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모범생 윤서로서는 노상 벌 받는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아이고, 생전 처음 준비물 때문에 벌을 받게 되는구나. 이 게 무슨 망신이람!’ 이렇게 생각한 그는 벌 받을 각오로 막 일어서 뒤로 나가려고 하는데 종혜가 갑자기 방안지 한 장을 얼른 윤서 앞에 내 놓는 게 아닌가!
윤서의 곤경을 면해주려는 종혜의 뜻을 얼른 알아 챈 그는 멋쩍게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그새 선생님은 아무런 눈치도 못 채신 채 완벽한 윤서의 준비물을 확인하곤 그의 옆을 지나쳐 가셨다.
이렇게 하여 위기를 모면한 그는 ‘후우 - ’ 하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옆자리의 종혜를 쳐다보았다.
순간 종혜와 윤서는 동시에 눈이 마주치고 저도 모르는 사이 미소를 보냈다. 종혜도 싱긋 미소를 흘렸다. 처음으로 종혜가 웃는 따스한 모습을 본 순간이다.
돼지꿈을 꾼 덕인지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처음이었다. 어느 새 땀이 다 말랐는지 이렇게 시원할 수가!
그렇게 보기 싫고 얄밉던 종혜가 오늘따라 미덥고 예쁘게 느껴지는 것은 모눈종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본시 이렇게 착하고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던 종혜를 우린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사이에 영길이에게 품었던 미운 감정도 누그러지고 속이 평안해 짐을 느꼈다. 그 동안 윤서는 공연히 종혜를 미워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돼지꿈은 확실히 행운을 갖다 주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즐거운 하루가 이어졌다.